[칼럼]김장하 선생 질문을 던지다: 왜 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지배 하는가?

'참어른' 김장하 선생의 평생에 걸친 조용한 나눔과, 그의 도움과 "사회에 갚으라"는 가르침으로 법관이 된 문형배 전 재판관의 삶을 조명합니다. 두 사람의 인연과 최근 만남에서 김 선생이 던진 "왜 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은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줍니다.

[칼럼]김장하 선생 질문을 던지다: 왜 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지배 하는가?
출처: [오마이포토] ‘파면’ 선고 문형배 전 대행 반긴 김장하 선생 ⓒ 김보성

우리 사회에는 스스로를 낮추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빛을 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범한 한약업사였으나 '진정한 어른'으로 존경받는 김장하 선생과, 그의 도움으로 법조인의 길을 걸어 헌법재판관이라는 공직의 정점에 섰던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이 바로 그런 분들입니다. 두 분의 삶은 조용한 선행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가치가 어떻게 우리 사회에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는지 보여줍니다.

'어른' 김장하: 조용한 기여의 삶

김장하 선생은 1944년 경남 사천의 가난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운 형편으로 중학교 졸업 후 학업을 잇지 못했습니다. 삼천포의 한약방 점원으로 일하며 주경야독 끝에 한약업사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가난과 학업 중단의 경험은 평생 어려운 이웃, 특히 배우고 싶어도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 대한 깊은 공감과 연대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1973년 진주에 '남성당한약방'을 열고, 2022년 은퇴하기까지 약 50년간 운영했습니다. 그는 "아픈 사람 주머니에서 나온 돈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신념으로 박리다매를 원칙 삼고, 형편이 어려운 환자에게는 돈을 받지 않기도 했습니다. 한약방은 단순한 치료 공간을 넘어, 그의 모든 나눔과 사회 활동의 거점이었습니다. 폐업 후 진주시에서 이 공간을 매입해 그의 정신을 기리는 '진주 남성당 교육관'으로 만들기로 한 것은, 그의 삶이 지역 사회의 소중한 자산으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줍니다.

김장하 선생의 나눔은 체계적이고 지속적이었습니다. 1983년 사재 100억 원 이상을 들여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하고 10년 뒤 국가에 기부했으며, 20대부터 시작한 장학 사업은 1,0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는 장학금 전달식 없이, 성적보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우선하여 졸업까지 지원했습니다. 문형배 전 재판관 역시 그의 장학생 중 한 명이었습니다. 2000년에는 남성문화재단을 설립해 지역 문화 발전과 장학 사업을 이어가다, 2021년 재단을 해산하며 남은 기금 34억 원 전액을 경상국립대에 기탁했습니다. 이 외에도 가정폭력 피해 여성 쉼터, 지역 극단, 지역 신문, 학술 연구 등 사회 곳곳에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드물었습니다.

이 모든 나눔을 실천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평생 자가용 없이 걸어 다니고, 낡은 양복을 입는 검소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철학은 "줬으면 그만이지"라는 말과 "돈은 똥과 같아서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된다"는 비유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는 어떤 대가나 명예도 바라지 않고, 재물을 사회를 위한 자원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을 낮추고 평범한 시민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묵묵히 봉사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문형배 판사: 원칙으로 빚어진 법관의 길

문형배 전 재판관은 1965년 경남 하동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학업을 이어갔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김장하 선생의 장학금을 받게 되면서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김장하 선생의 도움이 없었다면 판사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992년 판사 임관 후 약 27년간 부산, 경남 지역에서 근무한 '향판(지역 법관)' 출신입니다. 서울 중심의 경력 쌓기보다 의도적으로 지역 법관의 길을 걸으며 지역 사회에 봉사했습니다. 2019년 헌법재판소 재판관으로 임명되었고, 임기 마지막에는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맡아 2025년 4월 윤석열 전 대통령 파면 결정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사회 정의와 소수자 인권 보호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정의를 추구한다는 소신을 밝혔습니다.

그의 삶을 이끈 원칙은 "평균인의 삶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다짐과, 김장하 선생의 가르침 "내게 고마워할 필요 없다. 사회의 것을 네게 줬으니, 갚으려거든 사회에 갚으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이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고 법관으로서의 삶을 통해 사회에 빚을 갚고자 노력했습니다.

울림 깊은 만남과 시대적 질문

후원자와 장학생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시간이 흘러 각자의 자리에서 사회에 헌신하는 이들 간의 깊은 정신적 교감과 상호 존경의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2025년 5월 2일, 헌법재판관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문형배 전 재판관은 6년 만에 진주를 찾아 김장하 선생을 만났습니다. 이 자리에서 김장하 선생은 문 전 재판관의 노고를 치하하며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한 것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김장하 선생은 문 전 재판관에게 깊은 고민이 담긴 질문을 던졌습니다. "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지배한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한 아픈 성찰이 담긴 질문이었습니다. 이에 문 전 재판관은 "(이를 해결할)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겠느냐"며, "요란한 소수를 설득하고 다수의 뜻을 세워 나가는 지도자가 나올 것이라 본다. 그런 게 가능한 게 민주주의이며, 이번 탄핵도 그런 연장선이라 생각한다"고 답했습니다.

조용한 다수에게 보내는 메시지

김장하 선생의 삶과 문형배 전 재판관의 여정, 그리고 두 분의 만남은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부와 명예, 자기 과시가 넘쳐나는 시대에, 두 분이 보여준 겸손과 정직, 사회적 책임감과 공동체 의식, 그리고 신념을 묵묵히 실천하는 삶의 태도는 시대를 초월하는 깊은 울림을 줍니다.

김장하 선생이 던진 질문, "왜 요란한 소수가 조용한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비단 두 분만의 고민이 아닐 것입니다. 이 질문은 소리가 큰 집단에 묻혀버리기 쉬운, 침묵하는 다수의 목소리와 그 중요성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합니다. 김장하 선생의 조용한 나눔이 문형배라는 법관을 통해 사회 정의 실현에 기여했듯, 우리 사회의 건강한 발전 역시 이름 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선한 영향력을 실천하는 '조용한 다수'의 역할에 달려있지 않을까요?

김장하 선생과 문형배 전 재판관의 이야기는 조용한 선행과 원칙에 충실한 삶이 지닌 강력한 힘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요란한 목소리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고, 우리 사회의 진정한 가치를 지켜나가는 지혜와 용기를 얻게 됩니다.

[뉴스온블로그]